후앙 용 핑(Huang Yong Ping)의 작품 세계 포스트 모던적 요소와 그 너머

지난 3,4년간 지속된 세계 미술시장의 전례 없는 성황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중국 현대미술가들의 부상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8년 하반기부터 걷잡을 수 없이 불어 닥친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미술시장 버블이 한 순간에 무너지면서 나타난 가장 눈에 띄는 현상 역시 중국 현대미술가들의 작품 가격 폭락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급작스러운 가격인상과 폭락 등 요동치는 미술시장의 유행과는 상관 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철학과 시각세계를 제시하며 세계 미술 무대에서 꾸준히 홀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중국 현대미술가의 한 사람으로 후앙 용 핑을 들 수 있다.

그는 1954년, 중국 푸젠성(Fujian)지역에서 태어났다. 중국 미술의 역사와 철학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존 케이지(John Cage).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등 주로 예술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반발한 부류의 서구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작업들을 선보여 왔다. 중국 내에서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은 1980년대 초반, 그가 샤멘 지역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주창한 샤멘 다다(Xiamen Dada)운동이다. 후앙 용 핑은 이 그룹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중국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미술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천안문 사건에 연루되어 해외 망명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영원히 중국을 등지는 명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1988년 프랑스로 망명한 이래 프랑스 시민으로써 파리에 거주하면서 유럽 전역과 미국을 주요 무대로 활동하는 그의 삶 자체가 중국과 서구의 미묘한 관계를 다루는 작가의 작업을 잘 설명해준다. 아시아, 특히 중국과 서구,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과거와 현재 간의 갈등같이 두 개의 대립항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갈등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되어온 모든 가설과 통념, 전통을 뒤흔드는 후앙 용 핑의 작업은 언제나 위풍당당하고 파격적이면서도 섬세함을 잃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것은 2007년 3월, 뉴욕 글래스턴(Barbara Gladstone)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서였다. 몇몇 미술 잡지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당시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중국 미술 부상에 편승한 전시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는 약간의 선입견을 가지고 전시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전시를 둘러 본 후에 작가의 깊이 있는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시는 세 개의 설치 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사람 키만한 크기의 여러 개의 길쭉한 항아리 모양의 도자기들 속에 뱀, 박쥐, 늑대 등 다양한 동물의 박제가 웅크리고 있는 작품(사진1)으로 전시장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두개의 작품(사진 2,3)은 질 그릇 감촉으로 구워진 대형 토기들로 각각 로마의 콜로세움(coliseum)과 워싱턴 팬타곤(pentagon)의 형상을 띠고 있었으며, 토기의 안쪽 공간은 수풀과 잡초가 무성하게 심어져 있었다. 이 작품들을 보면 즉각적으로 도자기와 토기가 생명을 잉태하거나 보호하는 용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콜로세움과 팬타곤 형상의 작품은 역사를 관통하는 인류의 폭력성을 평화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쉽게 파악하게 한다. 이 두 건물은 각기 과거에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피 비린내 나는 스포츠와 오늘날 세계 최대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 핵심 기지로서 과거와 현재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도상적 건축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천진난만한 태도로 식물을 심어 넣음으로써 작가는 피와 폭력을 우거진 식물 분지로 탈바꿈시킨다. 이로써 작가는 폭력적 건축물을 평화로운 삶을 위한 일종의 모판으로 재생산하고 건축물은 생명을 푸는 것 이외의 용도를 상실하게 된다. 식물 재배용 용기로 전환된 이들 피와 대량 학살의 상징물들은 폐허의 모습을 한, 말 없는 유적처럼 느껴진다.

2009년 5월, 뉴욕 글래스턴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통해서 후앙 용 핑의 작품을 다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뱀 탑, Tower Snake(사진4)”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일종의 전망대와 같은 대형 설치 구조물로 몸을 둘둘 말고 있는 뱀의 뼈 형상을 본 떠서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나선형의 램프 계단 기능을 지닌 이 작품은 꼬리에서 머리까지, 아래에서 위로 관객이 직접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서구의 건축 전통이 교모하게 혼합되어 있다. 뱀의 뼈가 일련의 아치 형태로 연속되어 있기 때문에 걸어 올라가면서 위를 쳐다보면 마치 고딕 성당의 내부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겉에서 보면 나선형의 형태가 바벨탑의 형상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것이 또한 뱀 모양이기 때문에 관객으로 하여금 기독교적 구원을 가능케 한 원죄의 장본인인 에덴 동산의 뱀과 유혹, 인간의 욕망 등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이 작품은 서구 문명이 말하는 인간의 원죄의 역사 속으로 관객의 발걸음을 유도하면서 그에 대한 사색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서 고딕 성당이나 바벨탑과 같은 서구 건축물의 근간이 대나무라고 하는 지극히 아시아적, 특히 중국적인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건축 현장에서 높은 곳에 올라서는 용도의 비계를 제작할 때 철 대신 대나무를 사용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이 작품을 제작할 때 작가는 중국에서 비계 제작 전문 노동자들을 데려와서 작업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작가는 서구의 구조물과 아시아적 재료를 혼합함으로써 서로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동서양의 두 문명을 하나로 엮어버리고, 유물론적 입장의 서구 문명의 근간 또는 대안으로써 아시아의 자연관과 유심론을 제안하는 듯이 보인다.

2007년도 전시에 이어 이번 전시에서도 후앙 용 핑은 다양한 재료를 도입하여 혼성 또는 잡종교배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아시아와 서구의 미술사적 전통, 역사, 종교와 정치적 사건들을 융합하여 개인적 경험과 문화에 대한 폭 넓은 사색을 교차시키고 있다. 두 전시 모두에서 작가는 문화적 생산물들을 해부하고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종(異種)들의 병치를 통해 역사, 국가적 정체성과 예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이로써 우리가 이제까지 그렇다고 믿어 왔거나 당연시 여겨 온 생각들과 문화의 전형, 특히 서구 모더니즘이 쌓은 권위에 도전하고 사회적 통념에 대한 전통적 태도를 전복시킨다. 이러한 측면에서 후앙 용 핑의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접근, 해석해 볼 수 있다.

하나의 형식에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초래하는 알레고리(allegory)를 배척한 모더니즘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이 알레고리를 적극 수용하였다는 사실로부터 모더니즘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성격을 명확하게 설명한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는 알레고리의 세부 전략으로써 차용, 장소 특정성, 일시성, 병렬과 누적, 추론적 성격, 잡종교배를 든다. 위에서 언급한 두 전시에서 살펴본 후앙 용 핑의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특성 가운데서도 오웬스가 설명하는 알레고리적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콜로세움과 팬타곤 작품에서 우선 우리는 차용의 전략을 읽을 수 있다. 본래의 건축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이 작품들을 명백하게 실존하는 건축물의 축소 복제물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작품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실제의 건축물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사물들로부터 공통점을 유추하고자 하는 습관을 바탕으로 관객들은 두 건축물이 인류 역사의 폭력성을 상징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곧이어 이 폭력을 상징하는 건축물 모형들 속에서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한 수풀로 인해 콜로세움과 팬타곤이 실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생명을 잉태시키는 화분의 역할로 전환되어 있으며, 이로써 작가가 폭력의 진원지를 비활성화시킴으로써 평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우리는 후앙 용 핑의 이와 같은 전략을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기보다는 이미지에 또 다른 의미를 덧붙이는 알레고리적 차용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후앙 용 핑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뚜렷한 알레고리 전략적 징후는 이종들의 병치를 통한 잡종교배 방식이다. 2007년도 전시부터 우리는 도자기, 토기(인공물)/박제동물, 식물(자연), 콜로세움, 팬타곤(폭력,죽음)/ 식물(평화, 생명)의 병렬, 그리고 2009년 전시 작품인 “뱀탑“으로부터 서구 건축물(고딕 성당, 바벨탑)/아시아 건축재료 및 테크닉(대나무, 비계 제작), 서구의 종교적 원죄(뱀의 형상)와 구원/아시아의 명상 등과 같은 이종들의 병치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후앙 용 핑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대립항들은 서구의 이원론에 바탕을 두지 않고 중국 전통 사상의 하나인 주역(周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역에서는 서로 반대의 위치에 놓인 것들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가 없어서는 안 되는 보충적인 관계, 즉 조화와 균형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후앙 용 핑의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대립항들 역시 대립적인 관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두 대립항들이 서로를 넘나들면서 화합하고 하나가 되는 융합을 제시한다. 주역을 토대로 한 이러한 대립항들의 병렬과 화합을 통해 작가는 인간/자연, 선/악, 이성/감성, 객관/주관 등을 구분하고 대립항 속에 내재된 갈등과 불균형을 강조하는 서구의 전통적인 이원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서구 모더니즘을 포함한 기존 관념의 파괴와 새로운 의미 창조를 즐긴다.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는 오웬스가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 미술가들의 대표적 전략 가운데 하나인 알레고리적 잡종교배의 성격을 다분히 보여준다. 여기서 알레고리적 잡종교배란 서로 관련이 없는 것 또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병치시킴으로써 그것들 속에서 새로운 관계나 의미를 발생시키고자 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후앙 용 핑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특성을 로잘린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제시한 ‘조각영역의 확장’에서 조각은 보편적 범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한정된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조각을 기념비적 재현조각, 모던 조각, 포스트모던 조각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모더니즘 시기에 예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던 ‘풍경'과 ‘건축'이라는 두개의 용어를 예술의 영역에 편입시키는 것을 포스트모던 조각의 특성으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확장된 조각의 세 가지 영역으로 건축과 비-건축 사이에존재하는 ‘공식화된 구조’, 풍경과 건축 사이에 존재하는 ‘위상-구축‘, 풍경과 비-풍경 사이에 존재하는 ‘표지된 위상'을 각각 제시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여 볼 때, 건축은 아니지만 건축적인 요소들을 도입하여 건축적인 체험을 제공하고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축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후앙 용 핑의 작품들은 건축과 비-건축 사이에 위치하는 ‘공식화된 구조’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차용, 잡종교배와 같은 알레고리 전략의 도입, 조각영역의 확장 등의 측면에서 고찰하여 보면 후앙 용 핑이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일반적인 전략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샹, 보이스 등 서구 미술가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그들의 계보를 이으며 중국에서 샤멘 다다 운동을 주창하고 이끌었던 그에게서 서구 모더니즘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독창성, 자율성, 진보의 개념에 도전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일반적인 특성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서구의 포스트 모던 전략을 쫒아가는 수 많은 동시대 미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작품에는 제도와 권위에 도전하는 미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치명적인 모순점이 잠재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그가 유럽 전역의 국제 미술전을 비롯하여 워커 미술관(Walker Art Center, Minesota), 벤쿠버 미술관(Vancouver Art Gallery, Vancouver)등 세계의 유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있으며, 현재 뉴욕 10대 파워 갤러리에 속하는 글래스턴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미술에 대항하여 국제자유대학 설립, 나무 심기 운동 같은 넓은 의미의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을 주장하던 보이스가 고급 갤러리에서 일부 특권층을 위해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과 같은 모순이라 하겠다. 또한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미술 비평가 로베르타 스미스(Roberta Smith)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후앙 용 핑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매우 공들여 제작되기 때문에 기존 관념과 전통에 대한 도전과 전복이라는 작가의 의도가 명백하게 이해되기 전에는 새로운 종류의 형식주의 미학의 계보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점과 차별화되지 않은 포스트모던 전략에도 불구하고 후앙 용 핑의 작품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작품 속에 담긴 진정성과 용기에 있다. 그는 다른 무엇인 체 가장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진솔하고 진지하게 다루며, 우리들이 회피하고 싶어하는 질문들을 정면에 던질 수 있는 대범함을 지니고 있다. 또한 운명적인 망명자의 삶을 통해 얻은 예리한 통찰력과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는 서구 문명이 합법화해 온 모든 역사적 서술, 전통적인 지식과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서구와 아시아, 특히 서구와 중국이 맺어온 관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구 미술가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 있고, 또 그러한 방랑자적 삶을 통한 자신만의 고유한 체험을 작품에 잘 활용할 줄 안다. 그러한 하나의 예로써 2002년 광저우 트리엔날레(Guangzhou Triennial)에 출품하려고 했다가 중국 정부의 제지로 인해 전시가 최소되었던, “박쥐 프로젝트, Bat Project”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중국 영토를 침범한 “박쥐"라는 이름의 미국 첩보비행기가 자국 해상을 정찰 중이던 중국 군용기와 충돌하여 중국인 파일럿을 사망하고 하이난(Hainan)섬에 불시착하였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을 빌미로 긴박한 외교 협상을 통해 중국은 자국에게 유리한 조건 하에 미국과 몇 가지 합의를 이룬 후, 미국 측 비행기를 완전히 해체하여 미국으로 돌려보내주고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후앙 용 핑은 이 미국 첩보비행기의 조종석과 날개를 실제 사이즈 그대로 제작하고 조종석에 박쥐 박제를 가득 채우는 대형 설치 작업을 진행 중이었으나,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염려한 중국 정부가 전시 오프닝 며칠 전에 작품을 철거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극히 예민한 정치적 현안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라고 하는 두 개의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의 예를 통해 우리시대의 삶 속에 만연해 있는 긴장과 어눌한 소통 상황을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동시대 미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있다.

서구와 중국 간의 예민한 정치적 사건을 통해 대립 관계 문화 간의 갈등을 다룬 또 다른 좋은 예로 2008년 6월부터 9월, 바비칸 미술관(Barvican Art Gallery, London)에서 열린 전시를 들 수 있다. 런던에서 개최된 이 첫 번째 미술관 개인전에서 그는 19세기 영국과 중국 간의 제국주의적 역사를 탐구하는 설치 작품을 통해 아편 전쟁을 재조명하였다. 중국의 아편 몰수와 수입 금지 조치에 대한 반응으로 영국으로 하여금 무력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난징조약을 통해 중국의 항구 이용에서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고 홍콩 지배권을 얻어내게 한 아편 전쟁을 중국 미술가가 영국 한복판에 위치한 미술관에서 다룬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전시에서 정치적, 역사적 사건을 다루지만 현실적인 차원의 논쟁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예술적인 사색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미학적 구체제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그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발명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논리적, 미학적 모순점에도 불구하고 후앙 용 핑은 앞으로 오랫동안 중요하게 다루어질 동시대 미술가의 한 사람이라 확신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기존의 분류 체계를 뒤집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후앙 용 핑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만약~이 아니라면'의 가정과 더불어 우리가 믿어 온 모든 것들에 대해 재점검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분명 정신적 안락함과 편안함을 위한 방편으로 우리가 쌓아 온 인식론적 자각의 기반을 흔드는 몹시 불편한 요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후앙 용 핑의 미술에는 이러한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은 질문들을 대면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인식론적 안락함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모습을 깨워주는 힘이 있다. 바로 이 점이 후앙 용 핑의 미술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글_정윤아(상명대학교 문화예술경영 겸임교수)